KOREA BUILD MAGAZINE
코리아빌드 매거진
대한민국 건설·건축·인테리어의 현재와 미래를 담는 코리아빌드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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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켜고 끄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온도를 맞춘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손이 닿는 물건이지만, 잘 지은 공간일수록 그 물건은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벽에 거의 묻혀 있기 때문이다. 독일 브랜드 융(JUNG)이 100년 넘게 만들어 온 스위치가 꼭 그렇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스위치 뒤에서 공간 전체를 제어하는 융의 기술 역시 같은 길을 간다 — 눈에 띄지 않는 쪽으로.
하이엔드의 기준은 어디로 옮겨가고 있나
'하이엔드'라는 말이 이렇게 흔해진 적이 없다. 고급 주거 브랜드부터 고급 사무 공간, 호텔과 리조트까지 어디에나 붙는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이 가리키는 내용은 예전과 꽤 달라졌다. 십여 년 전만 해도 하이엔드는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됐다. 희소한 입지, 넓은 면적, 값비싼 마감재, 이름난 해외 브랜드의 가구와 조명. 공간의 격은 보이는 요소로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다른 쪽을 본다. 자재의 등급이나 화려함보다, 실제로 그 공간에서 어떻게 사는지를 따진다. 얼마나 편안한지, 운영은 효율적인지, 그 가치가 시간이 지나도 유지되는지. 마침 디지털 기술이 이 변화를 밀어붙였다. 건축은 완공과 함께 멈추는 구조물이 아니라, 사는 사람의 생활에 반응하며 계속 달라지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이 변화를 누구보다 오래전부터 실천해 온 회사가 있다. 1912년 독일에서 출발한 융이다. 세계의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융의 스위치와 제어 장치를 고르는 이유는 성능 한 가지가 아니다. 그들이 고르는 건 하나의 스위치라기보다, 공간을 바라보는 한 가지 태도에 가깝다.
짙은 색 주방. 황동 마감 스위치가 벽의 일부처럼 자리 잡았다. 잘 짠 공간에서 스위치는 좀처럼 도드라지지 않는다.
자료 · 융 코리아
융의 스위치는 60년째 같은 얼굴이다
융의 대표 제품인 LS 990을 보면 그 태도가 분명해진다. 이 제품은 지금도 전 세계 건축 현장에서 그대로 쓰인다. 단순한 정사각형, 군더더기를 덜어낸 비례. 처음 봤을 때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이, 시간이 갈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실 LS 990은 화려한 제품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디자인은 최대한 절제돼 있고, 벽면에 조용히 녹아들도록 설계됐다. 그런데 건축가들이 매력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공간의 주인공은 스위치가 아니라 건축과 그 안에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품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절제가 어떻게 50년 넘게 버틸까. 유행을 타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지으면 수십 년, 때로는 세대를 넘겨 쓰는 게 건축이다. 거기 들어가는 물건이 몇 해 만에 낡아 보이면 곤란하다. 오래가는 디자인은 그래서 그 자체로 하나의 값이다.
LS 990의 분해 구성. 단순한 정사각형 겉면 안에 프레임과 접점, 메커니즘이 정교하게 들어찬다.
자료 · 융 코리아
이 한결같음을 떠받치는 건 직접 만든다는 고집이다. 융은 1912년 알브레히트 융(Albrecht Jung)이 독일 샥스뮐레(Schalksmühle)에 세운 뒤 114년 동안 전기 설비와 제어 기술을 직접 발전시켜 왔다. 일찍부터 제품에 쓰는 공구까지 자체 생산했을 만큼, 만드는 과정 전체를 손에 쥐고 품질을 지켰다.
창업자 알브레히트 융. 작업대에서 직접 부품을 매만지며 회사를 일궜다.
자료 · 융 코리아
1952년 샥스뮐레 공장. 제품에 쓰는 공구까지 직접 만들던 시절이다.
자료 · 융 코리아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스틸, 황동, 유리처럼 서로 다른 소재를 다루는 제품군도 그 바탕 위에서 나온다. 저마다 다른 건축 언어와 어울리며 공간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세부가 된다.
장갑 낀 손으로 황동 커버를 다듬는 모습. 소재를 고르고 마감하는 공정을 융은 자체적으로 관리한다.
자료 · 융 코리아
디자인의 폭을 넓힌 또 하나의 줄기는 색이다. 융은 건축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정리한 색채 체계를 적용한 컬렉션(Les Couleurs® Le Corbusier®)을 선보여 왔다. 르 코르뷔지에는 색을 장식이 아니라 건축을 이루는 요소로 봤는데, 융은 그 관점을 오늘의 공간에 옮겨 스위치와 제어 장치마저 공간의 색을 완성하는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결국 모든 제품이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이것이 10년 뒤, 20년 뒤에도 여전히 가치 있어 보일까?" 융은 114년 동안 그 답을 찾아왔고, 답은 세계 곳곳의 하이엔드 주거와 호텔, 문화·상업 공간에 남아 있다. 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스위치 하나, 손끝에 닿는 소재의 질감 하나가 공간 전체의 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하이엔드가 큰 데서가 아니라 작은 데서 완성된다는 말은, 이런 자리에서 사실이 된다.
그러나 디자인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하이엔드는 잘 다듬은 디자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공간을 쓰는 사람들은 더 나은 경험을 기대한다. 조명이 알아서 밝기를 맞추고, 실내 환경이 상황에 따라 조절되고, 에너지가 새지 않게 관리되는 공간. 이미 적잖은 고급 현장에서 기본으로 깔리는 조건이다.
여기에 한 가지 역설이 있다. 좋은 기술일수록 사용자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 제값을 한다. 복잡한 조작을 요구하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내며, 공간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는 것. 그런 기술이라야 진짜 똑똑한 기술이다. 앞서 본 스위치의 절제와 묘하게 닮은 이야기다. 그래서 융은 디자인과 기술을 따로 떼어 보지 않는다. 디자인이 기술을 담는 그릇이라면, 기술은 그 디자인이 약속한 경험을 채워 넣는 일이다.
기술의 토대는 KNX다. 건물의 여러 기능을 하나로 묶어 제어하는 국제 표준 규격으로, 조명과 블라인드, 냉난방, 환기, 보안, 에너지 관리까지 한자리에서 다룬다. KNX의 진짜 강점은 특정 제조사에 매이지 않는 개방형 표준이라는 데 있다. 건축주는 긴 안목으로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고, 여러 제조사의 제품을 자유롭게 묶을 수 있다. 수십 년을 가는 건축물의 성격과 잘 맞는다 — 오래가는 디자인을 고집하는 이유와, 오래 쓰는 기술 표준을 택하는 이유가 정확히 같다.
융은 이 위에서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선 '지능형 공간'을 만든다고 말한다. 생활 패턴에 맞춘 조명, 계절과 시간에 따라 최적화되는 냉난방, 실내 환경 관리, 에너지 절감이 한 체계 안에서 맞물려 돌아간다. 최근에는 'JUNG HOME'으로 보다 손쉬운 주거용 제어를 내놓았고, 삼성전자 스마트싱스(SmartThings)와도 손잡아 서로 다른 제조사의 기기까지 한 환경에서 다루게 했다. 스마트폰 하나로 조명과 블라인드, 가전을 함께 관리하는 식이다.
벽에 묻힌 터치패널 하나로 조명·블라인드·냉난방·음악을 부른다.
자료 · 융 코리아
JUNG HOME은 같은 제어와 에너지 사용 현황을 스마트폰 안으로 가져온다.
자료 · 융 코리아
그러나 융이 힘주어 말하는 건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기술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거드는가다. 기술은 공간의 중심이 아니라, 사는 사람을 뒤에서 받쳐주는 배경이어야 한다는 것.
지능형 공간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 이야기가 추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건 실제 현장에서 확인된다. 제주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자리 잡은 두가헌(頭佳軒)은 갤러리이자 한 수집가의 집이다. 이곳엔 삼성 스마트싱스가 적용돼, 곳곳의 센서와 가전이 공간의 상황과 생활 패턴에 따라 알아서 작동한다. 조명과 온도도 따로 놀지 않고 함께 관리된다. 그러면서도 융의 스위치와 배선기구는 인테리어의 완성도를 흩트리지 않은 채 제어를 맡는다. 작품이 주인공이어야 할 공간에서, 기술은 굳이 나서지 않는다.
서울숲 곁의 고급 주거 단지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는 규모가 다르다. 단지 전체에 KNX 기반 통합 제어가 깔려, 조명과 블라인드, 냉난방을 하나의 화면에서 다룬다. 한 채의 집을 넘어 단지 단위로 작동하는 셈이다.
두 공간이 함께 보여주는 건 분명하다. 이런 제어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주거의 가치를 이루는 한 축이라는 것. 그리고 규모가 크든 작든, 기술이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점도 같다.
물러서 있다고 해서 존재감이 없는 건 아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융의 디자인이 공간의 표정을 또렷이 바꿔 놓는다. 호텔 객실의 흰 배선기구처럼 단정하게 가라앉기도 하고, 르 코르뷔지에의 색을 입은 스위치처럼 벽면의 작은 회화가 되기도 한다.
호텔 객실 머리맡. 스위치와 콘센트, 충전 단자가 한 모듈로 단정하게 모인다.
자료 · 융 코리아
마감과 어우러지는 스위치와 온도조절기. 나무 벽의 결에 제품이 스민다.
자료 · 융 코리아
벽과 같은 톤으로 고른 르 코르뷔지에 색. 스위치가 벽면의 한 조각이 된다.
자료 · 융 코리아
좋은 조연이 공간을 완성한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60년 동안 얼굴을 바꾸지 않은 스위치와, 있는 줄 모르게 작동하는 제어. 둘은 멀리 떨어진 것 같지만 한 뿌리에서 나온다. 둘 다 한 걸음 물러서서 공간과 사람을 앞세우고, 자신은 조연을 자처한다.
융이 1912년부터 지켜온 생각이 여기 있다. 건축과 기술은 쉴 새 없이 바뀌었지만, 사람을 중심에 두는 공간을 만든다는 원칙은 그대로였다. 기술은 사람을 위한 수단이고, 공간은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배경이라는 것. 요즘 하이엔드 현장에서 스위치와 제어 장치가 단순한 설비를 넘어 건축과 인테리어의 한 요소로 대접받는 이유도 여기 있다. 예전엔 벽에 붙은 기능 장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공간의 디자인 언어를 마무리하는 세부이자, 조명과 블라인드, 냉난방을 아우르는 제어의 창구 노릇을 함께 한다. 기술이 전면에 나서는 대신 건축과 디자인 안으로 스며드는 것 — 융이 그리는 똑똑한 공간의 모습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과, 시대를 끌고 가는 제어. 언뜻 반대편에 선 두 가치를 융은 한자리에 세운다. 그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것. 좋은 조연이 무대를 비워줄 때, 비로소 공간과 사람이 주인공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