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BUILD MAGAZINE
코리아빌드 매거진
대한민국 건설·건축·인테리어의 현재와 미래를 담는 코리아빌드 매거진.
분야별 최신 트렌드부터 주목할 브랜드, 전문가 인사이트까지 산업의 모든 이야기를 전합니다.
'서로의 온기', '여백의 가치', '느리게 사유하는 즐거움'. 우리는 이런 것들을 찾아 주말마다 어딘가를 유랑한다. 과정을 통한 경험을 귀하게 여기고 일부러 돌아가는 둘레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헌데 이런 것들은 승효상 건축가가 50여 년 간 작업과 강연, 책을 통해 주창해 온 '빈자의 미학'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그를 소환한다. 2026년, 왜 우리는 그의 목소리가 갈급한가.
오랜 시간 도시와 건축의 흐름을 보아오셨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 선생님께는 어떻게 보이는지요.
기능(Function)이라는 단어가 도시와 건축에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인데, 이 단어는 모더니즘을 새로운 시대의 사조로 등장시키며 그 핵심적 개념이 되었습니다. 19세기 산업화로 인해 도시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때까지 지속된 중세시대의 도시구조가 도무지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오염된 집과 거리가 일상의 풍경이 되자, 스페인독감이라는 전대미문의 질병이 발생했습니다. 그 당시 전 세계 17억의 인구에서 5천만 명이 죽어야 했던 대참사를 겪은 후, 건축가와 사회학자들이 모여 기능과 효율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기존의 도시와 건축을 재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한 세기 동안 밀집되고 밀폐되며 밀접한 도시들을 경쟁적으로 만든 결과는 얼마 전 우리가 겪어야 했던 코로나라는 재앙을 다시 맞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코로나가 불과 몇 년 전의 사실인데도, 우리는 이를 잊은 듯 코로나 이전처럼 살고 있는 게, 저는 몹시 불안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결핍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잠시 초대받은 손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결핍'이라면 이 세상의 손님이라는 정확한 인식과 거기에 마땅한 행위 아닐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잠시 초대받은 손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무암 돌담 위로 코르텐강 사인이 걸렸다. 제주의 땅이 먼저고, 건축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얹힌다.
© JongOH Kim
그런 생각이 담긴 작업이 있다면 한 곳 소개해 주시겠어요?
이 생각에서 이룬 한 프로젝트를 소개하자면 제주도의 '애월한거'라는 작은 숙박시설인데, 이곳에는 이미 45그루의 오래된 소나무가 이 땅의 주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지금 짓는 건축은 그들의 주권을 더욱 강조하여 존재시켜야 마땅하다고 여겨 이룬 작업이었습니다. 여기서 손님 된 우리는 잠시 머물다가 이 땅과 이 땅에 오래 거주해온 소나무들의 힘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45그루의 오래된 소나무가 이 땅의 주인이다. 건축은 그들의 주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나뉘어 앉았다.
© JongOH Kim
유리벽 너머 거실 앞으로 물과 정원이 펼쳐진다. 손님은 잠시 머물다, 이 땅과 오래된 나무의 힘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 JongOH Kim
공간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질주하는 우리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아마도 진정한 휴식입니다. 휴식(休息)의 한자는 나무 밑에 있으면서 마음에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지요. 그게 물신의 저주에서 빗겨나 사멸 직전의 우리들 영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오래전 우리는 여러 신들의 영향 아래 일상의 삶을 지냈습니다. 집터에는 터줏대감이 있었고 거실인 마루에는 성주신, 부엌에는 조왕신 심지어 화장실에도 측신이 살았으며 문턱마다 문신이 살고 있다고 믿어 늘 삼가하고 조신하며 살았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신당과 신당나무가 있어 마을을 출입할 때마다 공동체의 안녕을 빌며 지났는데, 지난 세기 갑자기 이 모두를 몰아낸 하나의 신이 등장했으니 바로 물신(Mammon)입니다. 이 강력한 재물의 신이 우리를 더 빠르고 더 촘촘하게 다그치며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댄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지만, 동시에 스스로 목숨 끊는 사람이 가장 많은 절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사유원 내에 제가 설계한 건축은 이를 목적으로 한 결과이지만, 굳이 이 목적의 건축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건축에서도 이러한 공간을 구축하는 게 저에게 부과된 임무라고 여깁니다.
눈 덮인 산속, 못가에 내려앉은 사담(俟潭). 물신의 저주에서 벗어나 영성을 회복하는 공간으로 지어졌다.
© JongOH Kim
그렇다면 선생님께는 어떤 건축이 좋은 건축인지요.
좋은 건축이란 자신의 존재가치를 위해 특이한 모습으로 이목을 끌어 이루는 유명한 건축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서로 나누는 건축일 것입니다. 바로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미학이 아니라 윤리"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건축은 그런 선의를 위해서만 그 직능이 존재할 당위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건축가라는 직위는 그럼으로써만 부여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웰콤시티가 떠오릅니다. 그때 건축주 너머 뒤편 마을에서 보일 풍경도 함께 살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요.
건축은 반드시 한 땅을 점거하고 존재합니다. 건축은 이 이유만으로도 공공의 가치 즉 공공성의 의무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땅은 어느 곳이든지 고유하며 그 건축이 들어서기 전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합니다. 건축주는 그 땅 혹은 그가 지은 건축이라고 해도 일시적으로만 소유할 뿐이며, 더구나 그 땅과 건축이 옆의 땅과 접속되어 서로 영향을 주는 한, 공공성의 가치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규율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며 편입된 그 사회의 공동선을 위배하게 되며, 그러한 건축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파편화 되고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웰콤시티. 네 개의 코르텐강 매스가 땅 위에 나뉘어 앉았다. 건축은 한 땅을 점거하는 순간부터 공공성의 의무를 갖는다.
© Osamu Murai
한국에서 젊은 건축가들이 마주한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립니다. 오래 이 일을 해 오신 입장에서 그들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직업의 직과 업은 다릅니다. 직(職)의 글자 뜻 자체가 남이 시킨 일을 해주는 행위인데 영어로도 점거된 상태(Occupied)여서 직은 Occupation이라는 영어를 쓰지만, 업(業)은 하늘에서 받은 일을 수행하는 형태 즉 부름을 받은 상태(Vocare)여서, 영어로는 Vocation이라고 쓰는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직은 시켜서 하는 일 즉 사명(使命)이지만, 업은 부름을 받아 하는 일 바로 소명(召命)일 것입니다. 그래서 직은 사직(辭職)하여 물러날 수 있고 정직(停職)하여 그만 둘 수 있지만, 업을 그만 두려면, 내쳐서 파업(罷業)하거나 전체를 뒤엎는 폐업(廢業)을 해야 합니다.
건축가가 자기 직능을 직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업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적 사무소에 있든, 소규모 설계사무실에 있든, 직과 업을 구별하여 직능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두 종류의 건축가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요즘 AI가 건축 도면과 형태를 단숨에 만들어내지요. 이 변화를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AI는 늘 단호합니다. 빠르고 단정적이며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 주저함이 없는 삶이 과연 옳을까요? 건축가는 자기가 살 집을 설계하는 자가 아니라 다른 이의 삶을 조직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우주보다 귀한 한 사람의 삶을 그렇게 쉽게 단정하고 확정할 수 있다면, 이는 너무 무모합니다.
망설여야 합니다. 한번에 그 디자인을 위한 아이디어가 생겼다 해도, 그 생각을 다시 뒤집어 생각하고 두근거리고 서성이며 두려워하고 그리고 그 거주인의 삶의 행복을 간절히 소망하며 다시 그려야 합니다. 건축가의 이 오래된 주저주저함이 오늘날의 단정적인 AI 시대에 더욱 절실하고 필요함을 젊은 건축가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노무현대통령기념관 구상 단면 스케치. 'rising land'와 'sentimental topography' 같은 메모가 선 위에 거듭 덧대어진다.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다시 그리고 또 망설인 흔적 그 자체다.
© 승효상
망설여야 합니다. 건축가의 이 오래된 주저주저함이 오늘날의 단정적인 AI 시대에 더욱 절실하고 필요합니다.
무엇이 선생님을 그토록 주저하게, 또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하는 걸까요.
일흔 중반에 이르도록 여전히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작업실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저의 처지를 보면, 저는 아마도 건축을 업으로 여기는 자여서 이 직능이 가지는 불안과 곤고를 업보로 치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