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의 미학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진다. 더 많은 취향을 반영해 더 나은 사용성으로 발전하는 건축재료 라는 점은 현재이고 미래까지 쉬이 예견할 순 없지만, 익숙한 소재였던 벽돌이 어떤 형태로든 계속 우리의 곁에 남을 재료란 것은 확실해 보인다. 벽돌은 시간이 그러하듯, 조적하는 것을 근간으로 견고함을 완성하는 건축재료이기 때문이다.
서울 구도심 산책, 세월의 온기를 담은 벽돌 건축 걷기 여행
건축가 김수근을 건축을 빗대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빛은 시간이고 시간은 쌓이는 것이다. 쌓아올리는 것을 전제로 하는 벽돌이라는 재료는 시간과 가장 가까운 소재다. 건축 소재와 시간이 친하다는 것은 지속가능성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견고함을 의미한다. 도심을 정처 없이 걷다가 필연적으로 마주친 견고함은 때로 마음의 위안이 된다. 건축가 김수근을 대표하는 1970년대의 붉은 벽돌은 건물들은 분명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랜드마크는 아니다. 그의 붉은 벽돌 건물들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발을 붙여야 더 잘 보인다.가우디의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경외감을 대신하는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처럼 소담하고 자주 재잘대는 목소리들이다. 그 덕에 우리는 도시 곳곳을 여행하며 눈 앞의 건축물이 주는 설렘을 느낄 수 있다.
점토벽돌의 따뜻함, 경동교회
ⓒ김수근문화재단
ⓒ김수근문화재단
경동교회의 붉은 벽돌은 ‘점토벽돌’이다. 점토벽돌에선 화학물질을 첨가하지 않고 자연재료인 흙을 반죽해 굽기만 해 포름알데히드와같은 유해성 물질이 검출되지 않는다. 이런 친환경적인 건축재료라 장식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점토벽돌 특유의 따뜻한 기운은 경동교회가 위치한 혜화동 언저리와 잘 어울린다. 이 교회는 벽돌로 지어져 변형과 오염에서 조금 멀어진 40년을 보냈다.
소통의 필로티, 공공그라운드 (구 샘터 사옥)
ⓒ공공그라운드
벽면 한가득 담쟁이로 뒤덮인 대학로의 벽돌빌딩은 마로니에 공원부터 동성고등학교, 창경궁로를 잇는 줄기의 랜드마크다. 김수근 건축가의 유려한 ‘벽돌 건축’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건축물 중 하나. 붉은 점토벽돌이 내는 온기는 지나는 사람의 소통이 원활하도록 한 필로티 구조에서 정점을 찍는데, 1층에 기둥을 세워 큰 길과 골목을 오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화장실을 공공에게 개방한 것이 특징이다.
ⓒ공공그라운드
1979년 완공된 샘터 사옥은 당대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낭만적 아지트로서 공공성이 짙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누군가에겐 만남의 광장, 누군가에겐 잠시 비를 피할 그늘이 되어주었던 이 건축물은 사회적기업 공공일호가 매입한 후 2018년 12월 ‘공공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비영리단체와 사회적기업, 학생과 청년들이 고민을 나누는 코워킹 스페이스로 거듭난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세월을 잘 품어낸 김수근의 벽돌 건축물이라 불리기에도 손색 없다.
콘크리트 벽돌이 주는 따뜻함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구 공간사옥)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창경궁길을 따라 안국역으로 향하는 길, 원서동에선 콘크리트 벽돌로 마감한 공간사옥의 외관을 만날 수 있다. 콘크리트 벽돌은 시멘트와 모래, 자갈 등을 물로 반죽해 압축, 성형해 굳힌 재료다. 경제적이지만 외형이 점토벽돌에 비해 투박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스 역시 우아한 청고벽돌이 주변의 다른 건물들 보다 높게 지어져있지만, 어쩐지 그런 차가운 인상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차가운 벽돌면 벽을 덮은 식물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간사옥은 가회동 주변의 낮은 건물들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의도됐다. 1972년 건축가 김수근은 전벽돌로 이 곳을 지으며 이른바 ‘공간시대’를 열었다. 건축과 예술을 아우르는 잡지였던 <공간>지 는 이런 기지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환경·건축의 문제에 대한 전통과 역사를 되새기며, 한국인이 더욱 한국을 알도록 하고, 현대의 상황을 기록, 정리, 비평하며 바람직하게 있어야 할 미래를 지향한다.
<공간>을 출간하는 사무실은 자리를 옮겼지만, 이 건물에 담긴 뜻을 반영할 만한 콘텐츠가 새로이 사람들을 반기는 중.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는 주목 할만한 젊은 한국 작가와 한국의 현대 예술사를 읽어 내기에 충분한 원로 작가들의 전시까지 만나볼 수 있는 기획력 높은 전시들을 선보인다.
서울 골목 여행, 다시 만나는 벽돌 건축의 현재
누구나 부서지거나 쓰러질 일 없이 견고한 삶을 원한다. 벽돌로 지은 건축물의 견고함은 외단열에 적합하고, 미세먼지나 오염문제에서도 다른 재료에 비해 자유롭다. 시간의 때를 자연스럽게 머금는 벽돌의 매력은 그런 다부진 성향에서 온다.
작지만 단단한 마음,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와이즈건축
ⓒ와이즈건축
콘크리트 벽돌로 마감된 100평 남짓한 30년 된 주택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 한 것은 2012년 5월의 일이다. 성산동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있는 이곳은 근사한 진입구나 훤칠한 로비, 친절한 안내 공간 같은 큰 공간은 없다. 다만 일반 주택보다도 작은 문 하나가 열려있을 뿐이다. 와이즈 건축의 장영철, 전숙희 소장은 이 프로젝트를 설명, 회고하는 글귀에 이런 말을 남겼다.
설계가 한참 진행중이던 2011년 8월 둘째 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시민단체 참가자들, 어린 학생들이 어김없이 굳게 닫히 일본대사관 문 앞에서 수요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과 붉은 벽에 굳게 닫히 일본대사관의 모습을 보며, 작아도 큰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박물관을 세우고 싶었다.
_ 와이즈건축
ⓒ와이즈건축
이 건축물의 독특한 외관의 상단은 ‘영국씩 쌓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입면상 층과 단면이 교대로 보이도록 쌓는 법법. 통줄눈이 생기지 않는 이 쌓기 방법은 가장 튼튼하고도 간결한 시공법이다. 이 건물에서 벽돌은 그런 방식으로 작지만 견고한 태도를 보여준다.
지금, 서울, 벽돌 ― ABC사옥
흔히 강남을 떠올리면 8차선으로 길게 늘어선 평지를 생각하기 쉽지만, 조금만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꽤 가파른 오르막이 등장한다. 이 곳에 위치한 건물들은 강남의 주거지역과 사무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와이즈 건축의 ABC사옥이 여기 위치해있다. 테헤란로를 끼고 있는 선정릉 부근은 강남 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입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밝은 콘크리트나 석재를 쓴 주변 건물의 외관과 달리 엄숙하게 들어선 검정색 전돌 벽면은 선정릉의 풍경과도 잘 어울린다.
ⓒ와이즈건축
ⓒ와이즈건축
외관이 주는 압도감에는 모두 건축가의 치밀한 설계의도가 포함되어있다. 벽 부분은 메꾸어져 있지만 외부 계단을 통하는 통로는 건식 비워쌓기 방식으로 가볍게 메꾸어져 미감을 더한다. 전돌 벽면은 시선을 차단하되 빛을 들여오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한국적인 풍경을 담아내는 골목길이자, 선정릉을 바라보는 산책로가 되어준다. 전면부의 유리는 실내에서 선정릉에서 강남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을 확보하며, 전벽돌의 중후함과도 잘 어울린다. 벽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 이 건물은 벽돌의 오늘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점토벽돌의 나즈막한 따뜻함에서, 인간의 시선과 지역색 그리고 기능을 담아 낸 벽돌의 오늘을.